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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날개로 봅시다

작성일 2013-12-1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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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영인(시메온) 조회 1,31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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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신신부님을 이해하는데 도움될 것 같습니다


"北의 획일적인 것이 싫어서 금강산도 안갔다"


2013.12.02.한국일보 서화숙 선임기자


박창신(72)신부. 2012년 8월에 전북 익산 모현성당에서 은퇴한 원로사제인 그는 지금 정국의 소용돌이 안에 있다. 그가 22일 군산 수송동 성당에서 열린 천주교 전주교구 시국미사에서 북한과 적대적으로 지내고 정부 비판하는 이들을 '종북'으로 이름붙여 적으로 돌리는 집권세력을 비판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까지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가 '종북몰이'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사건은 서해 해역에서의 한미군사훈련이 북한을 도발한 탓이라고 발언한 것에 정부 여당 인사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극렬하게 비판했다. 이에 맞서 사제의 강론을 검열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 탄압이라는 반론도 꾸준하다. 그를 만났다.


전북 익산 출신으로 전북대 화공과를 나온 후 뒤늦게 신학대학에 입학, 73년에 서품 받은 그는 75년부터 전주교구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를 역임했다. 집안에 좌익이라고는 하나 없었고 넉넉하게 성장했고 보수적이어서 정부 비판하는 농민운동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시골신부가 서서히 현실에 눈떠간 과정을 그는 구수한 사투리로 들려주었다. 그는 80년 여산성당 봉직 때 광주 민간인학살의 참상을 알리다가 괴한의 테러를 당해 하반신 마비를 겪었고 지금도 오른쪽 다리를 전다.

전북대 화공과를 나오셨던데 어쩌다 사제의 길로 들어섰어요

"집안이 9대째 천주교예요. 어릴 때부터 신학교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내가 말을 더듬어서 자신이 없었어요. 대학 다니면서 교리교사 하고 본당 일을 많이 하다 보니까 더듬는 버릇도 없어지고 신학교로 가게 됐지. 그래도 아버지는 신부가 될지 확실히 모르니까 대학은 졸업하고 가라고 하셔서 군대까지 갔다 오고 스물여덟에 신학교를 갔어요."

군대는 사병으로 만기전역하셨다고요

"그럼요. 내가 얼마나 (군복무를) 잘했는지 마지막 8개월은 일반하사를 달았어요. 15사단 68대대 15미리 포병창에 있었어요. 신학교를 갈 생각이라 신부가 되면 여기 저기 공소(신부가 없는 작은 지역단위)를 다녀야 하니까 운전병을 지원했어요. 66년 무렵이라 운전배우기가 쉽지 않았잖아요. 처음에는 사격지원부에서 포 쏠 때 어느 방향 어느 높이로 작약을 얼마나 넣느냐 제원을 계산하는 일을 했어요. 그러다 운전사병으로 갔지. 15사단이면 중부전선 최전방이에요."

그런데 이번 강론 후에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국적이 의심스럽다는 비판까지 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참 어이가 없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야말로 주변을 좀 돌아보면 과연 애국가를 부를 자격이나 있는 사람들인지. 천안함 사건 나니까 벙커에 들어가서 회의 한 사람 중에 군대 간 사람은 국방장관 한 명 뿐이었다잖아요. 이번 정권 들어서도 장관 한다는 사람이나 그 자식 중에 군대 안간 사람이 많아요."

전방에서 근무하셨으면 북한군과 대치했던 경험도 있으신가요?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때만 해도 북한이 원수라고 여겼던 때라 북한 쪽을 노려보면서 경계를 아주 잘 섰지.(웃음) 우리나라가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전부 보수적인 교육만 시키잖아요. 가진 자들의 논리만 가르치고. 우리 집안이 원래는 부여에서 현감도 하던 양반인데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금산 쪽으로 도망가 숨어살면서 집안이 완전히 망한 거예요. 할아버지도 남의 집 머슴살이 하다가 처가살이 하는 정도였는데 아버지가 재산을 일궜어요. 익산의 용안면에서 두번째 부자였어요. 넉넉하게 컸지. 그래서 내가 처음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를 맡고는 참 이해가 안됐어요. 그때는 농민들 가르치기 위해 농민운동가들이 와서 세미나를 많이 했어요. 면에서 막고 동네에서 막는 걸 겨우 열어놓으면 이놈(농민운동가)들이 미치고 환장하는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웃음) 정부 헐뜯고 쌀 구매제도가 나쁘고 어쩌고. 내가 세미나 끝나고 뒤풀이 할 때 지도신부로 한 마디 해요. '너희들은 왜 그렇게 생겼냐(왜 그리 비판만 하냐)'그러면 얘들이 웃기만 하는 거야. 그런데 1년 반쯤 세미나를 하다 보니까 그 말이 참 맞다는 걸 내가 알게 된 거예요. 농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난을 못 면해요. 기업에는 싼 이자로 은행 대출을 해주어서 사업을 쉽게 하게 하고 농민들은 물가 오른다고 농산물 가격을 계속 올리지 못하게만 하니까 살기가 어려운 거잖아요. 그러니까 쌀값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 농협을 민주화해야 한다, 그 말이 맞잖아요. 그래서 우리(가톨릭 농민회)가 78년에는 대대적으로 쌀생산비 조사도 했어요."

그 결과 바뀌었나요?

"바뀌는 건 없고 그때부터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들한테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걸 겪게 됐어요. 이리(익산의 전신)경찰서 정보과에서 나를 아버지도 모르게 조사를 하고 다닌 거예요. 고향 어른들한테 '박창신 신부가 공대를 나왔는데 왜 농민회 지도신부 하냐. 혹시 집안에 빨갱이가 있는 거 아니냐. 6.25때 부역한 사람이 없냐' 묻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전했어요. 농민운동이 '빨갱이'가 된다는 걸 그때야 알았어요."

분노하셨겠어요.

"그렇지요. 노동자 농민이 못사는 것도 억울한데 구조적인 문제인데 그걸 편들어주면 빨갱이가 되니까.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에야 북한과 화해하면서 이런 게 사라졌어요. 그러더니 다시 정부 비판하는 사람들을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비난하는 것이 살아나고 있어요. 어느 사회나 좌와 우가 있어요. 좌와 우가 정권교체를 하면서 정책도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가야 좋은데 좌는 무조건 적이에요. 지금은 누가 노동자나 농민보고 너 좌야 하면 깜짝 놀라면서 좌가 아니라 그래요. 선한 좌가 있는데 6.25 때문에 북한이 적이 되니까 '빨갱이'라고 하면 무조건 적으로 돌리고 상대도 안 한단 말이에요. 산업화의 중심에는 노동자와 농민이 있는데 기업하는 사람들이 산업화를 다한 것처럼 말을 해요. 기업하는 사람들이 사업하기 쉽도록 저임금과 저농산물 정책이 있었던 거에요. 농민회 지도신부를 하면서야 노동자 농민의 희생 위에 산업화가 됐다는 걸 안 거지요. 그러면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빨갱이로 모니까 화가 나잖아요. 그게 또다시 시작되니까 그건 막아야겠다고 해서 종북몰이를 지적한 거예요."

그래도 NLL(북방한계선)과 연평도 포격을 예로 든 것은 과격하다는 지적도 있어요.

"우리 성당 옆에 보훈지청이 있어요. 거기에서도 대선 전에 정부 비판하는 사람을 '종북'이라 하고 적으로 모는 특강을 했어요. 또 국정원에서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종북몰이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 선거는 종북몰이를 통한 부정선거다, 그걸 비판하게 된 겁니다. 특히 NLL에 초점을 맞춘 것은, NLL이라는 게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어서 분쟁소지가 있는 것인데 그걸 노무현 대통령이 양보했네 포기했네 하면서 쓸데없는 정쟁을 하고 있잖아요. 김영삼 대통령 때 국방장관 입으로도 말했어요. NLL은 우리가 정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넘어와도 어쩔 수 없다, 그랬어요. 그런데 총선에 활용하려고 '북풍'을 일으킨 것 아닙니까? 그러더니 김대중 대통령 때나 노무현 대통령 때는 화해분위기인데도 거기가 분쟁지역이 된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분쟁지역에서 한미군사합동훈련을 하냐는 말이지요.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 때문에 살인도 나는데 왜 분쟁지역에서 훈련을 하느냐는 거에요. 그냥 종북몰이를 비판하면 사람들이 듣지를 않아요. 이 정도 이야기를 해야지 들어요. 북한을 찬양하고 연평도 포격을 당연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걸 왜 종북몰이에 써먹느냐는 걸 비판한 겁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종북몰이를 비판하려면 북한이 더 나쁘다를 먼저 말하는 게 안전하다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 것도 종북몰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나는 획일적인 거를 싫어해요. (북한의) 획일적인 것이 싫어서 금강산도 평양도 안 갔어요. 그런데 이건 강의가 아니라 20분짜리 강론이잖아요. 그런 내용도 원래 강론에는 들어있었어요. 그런데 우리집에 프린터가 없어서 이걸 다른 데에서 프린트를 했어요. 강론을 하려고 보니까 두 쪽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즉석 연설을 하다보니 그 부분이 빠졌어요.(웃음)"

부정선거의 책임은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이명박 정부의 책임이잖아요.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하라고 한 것은 왜지요?

"박근혜 대통령이 부정선거 결과 당선된 것은 분명한데 그 경위를 정확히 밝히려고 하지않아요. 그러면 그게 이명박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같이 했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리고 대통령이 된 후에 약속한 것을 전부 깼잖아요. 경제민주화도 하지 않고 기초연금도 주지 않겠다고 하고. 종북몰이도 똑같이 하고요. 그렇다면 이런 대통령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성당 앞에서 극우주의자들의 항의도 많을 텐데요.

"전화는 아예 꺼놓았어요. 그런데 전국에서 응원하고 걱정해주는 분들이 더 많아요. 오늘도 내가 미사 두 대를 드렸는데 신자들이 나를 걱정해서 울먹울먹해요."

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전하다가 테러도 당했는데 무섭지 않으세요?

"테러 당하고 몇 년간은 군복만 보면 치가 떨렸어요. 그렇다고 할 말 못하지는 않았고 지금도 그런 것은 겁이 안나요. 그러니까 내가 멍청한 놈이지. 하하하"

당시 범인들이 누구인지는 잡혔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요. 노무현 대통령 때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진상을 밝혔어야 하는데 나는 민주화가 완전히 이뤄졌다고 보고 신부가 원수 만들 것 뭐있냐고 덮었어요. 이런 세상이 올 줄 알았으면 정확히 밝혔어야 하는 것인데. 그 날이 6월 25일이에요. 밤 11시 20분에 주방언니가 허겁지겁 올라왔어요. 밖에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도둑이 든 거 아니냐고. 그 얼마 전에 내가 공소에 간 사이에 사제관에 도둑이 들었거든요. 내가 손전등을 챙겨가지고 문 열고 나가는 순간, 스포츠 머리를 하고 길죽한 얼굴을 시커멓게 칠한 청년이 들어오더니 쇠몽둥이로 오른쪽 정강이를 내리치는 거예요. 아주 순식간이었어요. 머리를 맞으면 죽겠다 싶어서 얼른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쓰러졌어요. 나중에 보니 쇠몽둥이로 팔도 무지하게 맞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칼로 다섯 군데나 찔렸어요. 그때 머리 맞았으면 죽었어요. 성당 청년들이 나오니까 그 놈들은 도망갔어요. 처음에는 다리를 절다가 나중에는 하반신 마비가 와서 1년간은 휠체어를 타고 다녔어요. 그때 경찰에 신고해서 지문을 다 찍어갔는데도 범인을 못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광주 문제를 알리다가 그렇게 된 거지요?

"그때는 지역을 군인들이 막고 언론을 통제해서 사람들은 정부발표대로 광주에 간첩이 준동하고 있다고만 알았잖아요. 지금은 새누리당 간 김현장이 광주에서 도망와서 전주교구에서 '전두환 살육작전'이라는 문서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경상도도 나눠주고 전라도도 나눠주고. 나는 그걸 가져가서 타자 쳐서 더 만들었어요. 여산성당 강론시간에도 말하고 성당에도 붙이고 신자들에게도 나눠줬는데 여산성당이 관할하는 공소 가운데 충청도 관할이 있어요. 금산이 (전북에서) 충북으로 바뀔 때 충청도로 넘어간 거예요. 여섯 군데 공소에 그 문서를 보냈는데 중학생들이 그걸 보고는 화가 나니까 길거리에서 시민들한테 나눠준 거야. 그게 강경 경찰서에 접수가 되었어요. 그 근방 공소 회장들이 다 잡혀간 걸 이번에야 들었어요. 나한테는 미안해 할까봐 말도 안한 거지요. 그 중에 한 공소 회장님이 대전 계엄사에 잡힌 것만 들어서 내가 문정현 신부님한테 의논을 했어요. 그랬더니 '네가 들어가' 그래서 대전까지 가서 계엄사와 연결되는 군종신부님을 찾아서 의사를 전달했어요. 내가 들어갈 테니까 우리 신자들 내놓으라고. 그렇게 말하고 내려왔는데 나를 잡아넣지는 않더라고요. 그때가 5월말쯤인데 그 후에도 공소마다 스피커 가지고 다니면서 광주를 알렸어요. 그런데 묘하게도 여산성당 관할에 금마공소가 있는데 거기에 7공수여단이 있어요. 거기서 수요일마다 미사를 드리는데 신자 부인들이 그래요. 대전에 1개 대대, 전주에 1개 대대, 광주에 2개 대대가 파견됐다고.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들한테는 밥도 주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그런 일이 났어요. 83년 쯤에 금마에서 여산으로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택시기사가 '신부님, 수고하셨지요' 그래요.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이 사람이 80년 그날 금마에서 여산성당까지 여섯 명을 태우고 갔다고 하더라고요. 괴한 숫자가 6명인 것도, 금마에서 온 것도 그제야 알았어요. 사건 당시에는 택시운전사가 15일간 잡혀 있었다, 그런 말만 들었어요."

금마의 공수여단 군인들일 수도 있네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내가 다시 그 택시를 타서 (증언을) 녹음했어요. 경찰에 다시 이야기를 했지만 그건 못 잡는다고 하더라고요. 경찰이 수사 다 해놓았는데 우리한테만 밝히지 않는 거야."

가톨릭내에서도 염수정 서울교구 대주교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말한 정치참여 금지를 어겼다 그랬는데요.

"교황이 말한 정치참여 금지라는 것은 시의원되고 시장되고 정당 들어가는 것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밥먹는 것부터 쌀값 오르고 시내버스 요금 정해지는 것도 다 정치예요. 정치가 사회제도를 정하잖아요. 정치 아닌 것이 어디 있어요. 인간은 정치 속에서 살아요. 그런데 정치하지 말라는 것은 밥도 먹지 말라는 말이에요. 공자님하고 예수님이 뭐가 다른가. 죽음이 달라요. 공자님은 머리 하얗게 되도록 살고 예수님은 머리 시커멀 때 십자가에서 요절했거든요. 공자님은 좋은 말만 하니까 머리 희도록 살았지만 예수님은 사회를 비판했어요. 강론 때 말한,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아는데 너희는 왜 시대징표를 모르느냐, 그게 예수님 이야기예요. 시대를 모르면 예수님 따르는 게 아니예요. 그 당시에도 돈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죄인'과 같이 살았어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한테 한 말씀도 그거잖아요. '지배자는 백성을 억누른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전에는 '빨갱이'로, 지금은 '종북'으로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적으로 돌리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안된다고 사제로서 말해야 하는 것이에요."

신부님이 꿈꾸는 세상은?

"좌우가 서로 정권교체하며 사이좋게 지내는 세상."

실제로 가난하게 사세요?

"어느 정도가 가난하게 사는 거예요? 27평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요. 차? 차는 크레도스예요. 17년 됐는데 내가 운전사병 출신이잖아요. 34만 킬로를 뛰었는데 늘 내가 닦아주고 손봐주니까 아직도 잘 다녀요. 40만 킬로까지는 끄떡 없을 거에요."




사제단, 너무 오만하다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이 4대 강 사업 반대가 교회의 공식입장이 아님을 밝히고 북한 현실을 비판하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추기경의 궤변”이라며 반발하고 이에 동조하는 사제들은 추기경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사제들이 추기경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것도 놀랍지만, ‘궤변’이란 말이 묘하다. 아닌 게 아니라 성직자의 궤변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도스토옙스키가 지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가운데 나오는 ‘대심문관’이다. 카라마조프가 세 형제 중 둘째인 이반이 쓴 이 서사시에서 그리스도가 인간세계에 조용히 나타나 기적을 행하자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른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체포해 감옥에 가둔 다음 밤에 몰래 찾아가 본심을 털어 놓는다. 바이블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기적을 보이라는 악마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인간이 기적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인간은 원래 자유보다는 지상의 빵을 원하는 존재다. 이처럼 자유로움을 견뎌낼 수 없는 존재이기에 교회는 빵과 기적, 권력으로 인간을 구속함으로써 평화를 주었는데 뭐가 잘못 되었느냐는 것이 대심문관의 항변이다. 그리스도는 말없이 대심문관의 핏기 없는 입술에 키스를 하며 떠나간다. 결국 인간이 빵과 기적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대심문관의 말은 교회의 권력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궤변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묻는다. 누가 궤변론자인가. 추기경인가, 사제단인가. 독선에 가득 차 ‘사제의 언어감각’조차 잃어버린 사제단을 보면 궤변 여부에 관계없이 참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제단은 언제부터인가 세속적인 일에 신앙의 잣대를 들이대며 우리 사회에서 ‘대심문관’처럼 행세해왔다. 4대 강 문제는 일반인이 얼마든지 자신의 판단과 분별력에 의해 자유롭게 해결할 만한 사안인데, 왜 이에 대한 판단을 신앙의 이름으로 독점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성(聖)과 속(俗)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창조주의 뜻이나 사도좌의 전통을 거스른다고 위협하고 주일미사에 참여하러 온 신자들에게 일방적으로 4대 강 반대를 교리인 것처럼 강변한 것이 누구인가. 바로 그런 행위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고 말한 갈릴레이를 창조주의 뜻과 다르다며 박해한 중세 종교재판관의 판박이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또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시위와 삭발, 단식, 기자회견 등 권력에 몰입하는 일반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세속화된 행태를 보인 것도 사제단이다. 문제는 정부 정책이 부당하다며 교회의 이름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권력화된 교회가 돼 대심문관의 현대판 공범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땅에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사제단이여! 추기경이 교회 어른으로서 토목과 과학에 관련된 일을 신앙의 일처럼 말하며 권력화하는 교회의 일부 움직임을 경계해 마지않았는데, 왜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속된 무리처럼 편을 짜서 그를 비아냥거리며 핍박하는가. 아무리 권위불복종 시대라지만, 그대들은 사제가 되면서 교회 어른에 순명하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은 순명하지 않으면서 신자들에게 자신의 뜻에 순명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또 교회 내 다툼이 있으면 그 안에서 해결해야지, 세속의 법정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했던 바이블의 가르침도 기억하지 못하는가. 사제단에 대해 현대판 대심문관처럼 행동하지 말도록 추기경이 충고를 했다면 마땅히 침묵 속에 그 뜻을 새길 때다. 이런 침묵은 ‘양들의 침묵’처럼 강요된 것이 아니라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의 침묵’처럼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침묵일 터이다.
 
더구나 북한의 실상을 통탄해 마지않은 추기경을 ‘시대정신’이라고 하지는 못할망정 ‘골수 반공주의자’로 낙인찍는 사제단의 태도는 편견과 무지의 극치다. 세상은 어수룩한 것 같아도 상식과 순리가 숨쉬는 법이다. 북한 동포의 삶은 삼척동자라도 알 만큼 참혹한데, 눈물의 계곡에서 탄식하고 있는 그들을 우리가 어루만지지 않으면 누가 어루만지나. 사제단이 정의를 그토록 외친다면 북한 동포를 위해 촛불을 켜거나 한마디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동토의 왕국인 북한의 참상에 관해 말을 하지 않으면 돌이나 나무라도 벌떡 일어나 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바이블의 경고를 새겨들어야 한다.
 
사제단과 동료 사제들이여! 추기경의 충고를 계기로 과학의 일을 신앙의 일이라고 독단하며 현대판 대심문관이 되려는 유혹에서 부디 벗어나라. 이를 위해선 품위 있는 사제의 언행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2010.12.16.중앙. 박효종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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