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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영인(시메온) 댓글 0건 조회 1,017회 작성일 2018-04-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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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전은!!!

일본 1979년 8월호 鹿島出版會<現代の建築家> 특집호에서


마산 성당 -『神』과의 만남
김 수 근

「나는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고딕 이전 교회설계를 도맡아 했던 성직자의 직능을 불현 듯 연상하는 나는 Client인 Pr.Joseph Platzer(한국명-박기홍)에게 선언하듯이 토로했다.
관념상으로 나는 신에 대한 확정적인 정의를 갖고 있지는 않으나, 만약 신이 어떤 전지전능한 절대자라면 실존적인 측면에서 나는 「그런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유신론적(唯神論的)인 것이건 간에 제 현상의 배후에서 절서와 섭리를 관장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Platzer신부는 나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찾아 왔다면서 그게 뭐 대수롭냐는 태도였다. 문제는 그렇게 쉬이 틀릴 정도로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내 선입견이며 때문에 나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성서에 근거한 신학적 해석의 토대위에서 그리고 신도들만으로 구성된 건축위원회에서의 의결사항에 입각해서」라는 것이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요구조건으로 전제되어질 때 비교도(非敎徒)인 건축가가 감당해야 할 압력은 막중해지지 않나 하는 불안감이 움터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가 진행되어 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 지향하는 바가 일치되는 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러한 상호이해의 계기를 바탕으로 하여 결국 이 일을 맡겠다고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단단하면서도 따뜻하며, 신비로우면서도 인간미가 풍기는....」등등의 요망사항들은 Space와 걸맞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교회건축의 핵심적 명제로 등장하게된 이러한 개념이 이면에는 상당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서로 배우고 이해하려는 노력」이야 말로 이들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것은 참으로 기록할만한 초추(超追)였다.

계획의 이념(Ideology)

화해
성당의 조직이 갖는 위계질서는 성당의 건축에까지 확대 표현되어 지성소(Santuary)는 회중석(Nave)에 대해 위엄과 권위의 상징으로 양식화되어진 것이 근대이전이 전통적 기법이었고 이로 인하여 성직자와 일반신도간의 괴리현상으로까지 발전하여 통상 신은 저 높이 저 멀리 있다는 관념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이전의 대신관(對神觀)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은 성당의 근본주제인 「화해」의 정신에 위배되며 신은 친화가 불가능한 절대자가 아니라 오히려 신도들과 가까이, 또는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해의 형태는 주제인 신과 그 대상인 인간과의 관계를 근본으로 여러 양태로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자신의 내면적 화해, 신도와 성직자와의 화해, 그리고 그들이 이루는 교파와 그를 둘러싼 사회, 더 나아가서는 종교와 종교, 부자와 빈자, 자연과 인간 등등. 화해는 대립적 상관관계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며 공존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을 것이다.
교회―그것은 훌륭한 화해의 장(場)이어야 한다
축제(Sprit of Joy)
대립적 긴장이 화해되려면 그 대상물 간에 유형, 무형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한 그 만남의 유형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화해를 위한 「만남이 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전근대적 위엄과 권위의 상징으로만 인식되어진다면 즐겁고 기쁜 만남과 이에 따른 소기의 화해는 구현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만남의 장을 위하여 나는 내가 탐구하여 온 공간개념의 하나인 모태적 공간(Womb Space)를 도입하였다.
동물의 귀소본능을 충족시켜주는 포근함과 따스함이 있는 이러한 공간은 한 분의 먼지도 부착되길 거부하는 소독된 계기에서 느끼는 금속성의 매끄러움과 냉랭함이 아니라. 해묵은 이끼가 붙어 있고 그울음과 낙서가 널려있는 동혈(洞穴)과 같은 공간일 수 있다.
초현(超玄)하고 안락하며 소박하고 더러는 모호한 그러한 따뜻한 장소에 초대되어지거나 인도되어저 찾아온 사물이나 우연히 떨어져 들어온 그 교회는 「만남이 장」으로서의 기능을 다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위엄과 권위를 떠나 포용적이고 발전적인 겸양과 소탈함으로 이룩된 「축제의 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혹은 「자기화할 수 있는」그러한 분위기가 절실히 요청될 것이다.
다원성
교회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의 하나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모이는 이 만민들이 자기보호와 구원의 목적의욕만을 가질 때 그것은 전근대적인 교회의 구성만을 의미할 것이다. 현대의 교회가 시대적 상황을 의식한 어떤 「관계」에서 출발한 기능을 보유하고 이를 유지, 발전시켜야 함은 일반건축의 논리와도 같을 것이다.
교회 고유의 「예배」의 기능,「친교」의 기능, 그리고 신의 뜻에 따른 전도와 사회공익을 위한 「사회적」기능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만남의 행위가 그 영의 설정에 한계를 지님으로써 충족되어지지 않을 때 그 교회는 내적 과포화로 인하여 확장되어지거나 붕괴되어질 깃이다.
따라서 화해를 위한 만남의 축제에서 그 행위가 성공하기 위해서 교회는 원초적 계획에서「다원화」되어야 할 것이다.
환경
종교가 갖는 속성의 하나인 전도의 소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교회는 「환경적」요소로서의 의미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종교건축의 본연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상징성은 그 자체로서 신도, 비신도를 가리지 않고 물리적 환경으로서의 이미지 형성에 상당한 양향을 주기 때문이다.
권위를 돋보이기 위하여 악박감을 고양하는 스케일은 지양되어야 하며 주위환경과의 조화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는 높은 산 위나 광활한 대지 그리고 아름다운 수풀속에 세워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번잡한 주택가나 상가, 나아가서는 빈민가에 위치함이 더욱 타당할지도 모를 것이다.
눈을 감아도, 죄를 지을 때도 맹백히 그 마음으 근원을 기억하는 듯한 교회의 Identification은 그 형상에 있어서나 내적인 면에서 독자성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간의 배분과 종합
전술한 개념들과 이에서 추출(抽出)되는 여러 유형의 Activity를 수용하고 또한 이들의 복합적인 공동체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나는 부정형(不定形) 벽과 Slit를 강조하였다.
부정형(不定形)의 벽은 모태적 공간의 형성을 위한 틀로서 각각의 기능과 필요에 따라 크기와 각도를 달리하여 Slit는 이들을 한정, 종합하기 위한 개체로서 이용되었다.
공간의 배분과 종합은 다음과 같은 몇 개의 Zone으로 구성될 수 있다.
의식의 Zone
성당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제대를 중심으로 회중석이 놓여지고 전실에서 바로 통하는 고해소 및 Over flow가 일어날 때 회중석으로도 이용될 수 있는 회랑(廻廊)과, 외부에서의 접근이 자유스러우며 평상시에는 기대소(祈待所) 및 Over flow가 일러날 때 회중석으로 겸용될 수 있는 Capel등등으로 구성된다.
이상의 제 공간들은 평안하고 적당한 길이를 가진 진입로로 외부와 연결되도록 Main Level에 설치했다.
교육 및 친교의 Zone
교구내의 집회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행사에도 이용이 가능한 다목적 강당을 중심으로 몇 개의 회의실과 현관에서 연결되는 친교실(Koinonia Hall), 그리고 특별 행사에 사용될 서비스 시설 및 관리사무소 등이 주위에 배치되었다.
강당은 별관으로 계획한 유치원(추후 증축 예정)과도 연결된다.
주거 Zone
사제관 및 관리인 숙소 그리고 유숙객(留宿客)을 위한 침실 등으로 이루어지며 본당의 회랑(回廊)과 연결을 가지면서 독립된 위치에 배치되며 상주공간으로 남쪽에 구별될 필요가 있다.
Open Spaace Zone
도로에 접한 공용의 개념을 띠는 전정(前庭)과 반공용의 성격을 가진 중정(中庭)을 두어 의식도 가능하게 하며 양호한 일조조건을 가진 후정(后庭)에 놀이터를 뒀다.

이미지의 추출

빛이 주는 Happening
빛에 의하여 연출되는 분위기의 변화와 이에 따른 공간인식의 다양성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빛이 이루는 드라마는 상상이나 추리만으로는 감지할 수 없다. 빛의 유동에는 엄격한 규칙성이 있으나 그것이 이루어 놓은 행태에는 해프닝이 있다.
나는 빛의 이러한 우연성과 필연성과 극적인 조화를 기대하였다.
Pendantive와 흡사한 육각의 주지붕과 크기가 다른 부정형(不定形)의 지붕 사이에 Slit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은 그 근원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벽면을 스쳐 확산한다. 제단 뒷벽과 사잇벽에서 스며 내려온 빛은 뒷벽의 내측을 씻어 내린다.
특히 상호관입(相互貫入)이 이루어지는 부분과 정면의 가늘고 긴 Stain Glass를 통하여 나오는 빛은 현란(絢爛)하지만 자제된 질서에 의해 분산되어 오묘하고 유현(幽玄)을 줌으로써 신비로운 형성에 보탬이 된 것이다.
공간의 Sequence
공간전개의 기법은 은밀하면서도 암시적이어야 할 것이다. 계힉의도가 쉬이 드러나는 연출기법은 호기심을 유발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경이로움이 없고 지루할 뿐이다.
불연속적인 공간에 대한 체험은 단편적인 사건들로 집적된, 독립된 기억일 뿐이나 연속성이 의도된 공간에서의 느낌은 줄거리를 가진 드라마가 될 수 있다.
완만하고 느슨하게 돌아 오르는 Ramp와 그 보통이에 세워진 Visual Target로서의 십자가, 낫게 뚫린 문을 지나 좁고 길다랗게 패인 Slit의 개구부를 통해 제단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흐름, 그곳에서부터 밑으로, 옆으로 때로는 밖으로 전개되는 수직적이며 수평적인 공간의 변화.........
어느 한 통로도 뜻하지 않게 돌아서 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내부 동선에서 반복적인 순환을 가지는 이러한 공간조직은 통로의 폭과 천장고(天障高)등의 요소들에 의해 변화를 줌으로서 기대될 수 있을 것이다.
Human Space로 보는 신
낫고 어두우며 폭 감싸는 듯한 분위기의 지하분묘에서 관을 제단삼아 촛불을 놓고 예배하던 Catecomb에서 비롯된 교회의 양식은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부터 현대 이전까지 친화할 수 없는 신 중심의 권위를 보지(保持)하면서 허식에 흘러왔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이러한 경향은 점차 인간중심적인 초대교회적 분위기의 추구로 변모되어왔다고 한다.
이는 어떤 스케일의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 의식을 낳을 수 있는 감각의 공간, 또는 생활과 밀착될 수 있는 교회기능의 요구를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굽어보는 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주제와 대상에 맞게 적절한 높이 및 크기로 분화된 공간에서 인간자체로 출발하는 신에의 관조 및 인식이 오히려 더욱 요구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벽체가 서로 관입하고 공간이 친근하게 분활되며 자신을 완전히 노출시키기도 하고 더러는 그들의 신을 발가벗기기도 할 것이다.
Unique한 교회
종교의 유형이나 교파의 차이를 불문하고 신자는 그들의 신이 Unique하기를 바라며 그들의 공동체가 명학한 Identity를 공유하길 원할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지닌 보편타당한 속성일지도 모른다.
기능구성에서 비롯된 표현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형태가 아니라 지역, 이 시점에서 출발하여 응고되는, 결코 다른 것과 같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기적인 기능을 갖도록 짜여지고 구성된 부정형의 평면과, 통일과, 균제를 위해 제단을 중심으로 정점을 이루는 공간에서 유도된 형태 등은 그러한 연유에서 긍정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건축의 문제는 신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 공동체 인식의 문제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동체 인식의 개념은 스스로 신을 존재시킬 것이며 구성원 모두의 영혼을 소생시킴과 동시에 이를 둘러싼 환경을 밝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화해의 장으로서, 축제의 장으로서, 사회적 기능을 위한 장으로서 그리고 바람직한 환경의 장으로서의 소며을 견지할 이 성당의 의의는 단순히 나의 체험의 영역에서 그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日本 都市․建築․藝術 綜合雜誌7908 金壽根 특집

작품으로 마산성당이 맨먼저 언급 되었다. 이 때 김수근 선생은 신자가 아니어었으니 그냥 마산 성당이라고 명명하신 것 같다. 103쪽에서 116쪽에 게재되었는데 앞분은 <공간> 사무실에서 보내온 내용으로 약간 수정되었을 알 수 있다.

김수근 선생은 결국 신자가 되었다.
“불광동의 웅장한 성전을 설계를 하신 계기가 되어, 지난 1월 선생께 세례를 드린 본 신부의 마음은 더욱 그렇습니다”(1986.6.16.정의채신부 명당성당 장례미사 강론 중)


우리 성당도 이런 신과 인간과의 만남 의미를 총체적으로 편찬하여 교우들에게도 체계적으로 사목적의 의미를 전달한고, 일반인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전국 대학의 건축학도들의 필답코스이기도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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