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문Pr. & 친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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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손춘복 댓글 2건 조회 1,832회 작성일 2013-11-05 23:28본문
장소:윤봉문(요셉)순교성지(거제)
화창한 날씨에 검푸른 하늘을 이고 성모당에서 시작기도를 바친 후
다섯 명의 단원들이 차에 오르고 차머리를 거제로 돌려 달린다.
얼마를 달리자 차창에 빗방울이 몸을 던진다.
그래도 우리는 믿었다.
하느님의 딸들이 출타하는데 비는 무슨?
웅장한 거가 대교 통행료 넘 비싸!!
지세포 성당 성모님 품안에서 한컷!
더디어 윤봉문(요셉)순교성지 도착
십자가의 길이 조성된 대밭에는 호랑이가 지나간듯 수산하기만 한데!
그래도 작은 내를 건너며 땅방울 송글송글 맺혀가며 14처를 돌아 기도를 마치고
가을이 물들어가는 산자락에 자리잡은 님!
그 향기와 얼이 기념비에 그대로!!
군데군데 국화꽃이 순교자의의 웃음으로 우리들을 반기는데!
햇살이 떨어져 반짝이는 이 곳,
거제의 시가지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순교자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성지참배 후 유람선을 타고 외도로 가요.
사진 찍기를 꺼려하는 단원들의 뻘줌한 모습이
영 도시 스럽지 못하네.
그래도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는데!
언제 또 올까?
웃으니까
외도의 분위기와 같아지네요.
어린이 조각마당
이제는 돌아가야 한데요.
선착장으로 갑니다.
아름다운 해금강의 대 장경을
다 담지 못해 아쉽다.
사모관대를 쓴 신랑 바위
이빨을 드러낸 사자바위
-순교자 윤봉문(1852-1888년)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났었는가를 후손들에게 전해 준다.
옥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겨레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와 연결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 우수사 원균이 그 해 4월 왜군과의 교전에서 패전해 73척의 배와 군사를 거의 다 잃고 노량으로 도망을 간 후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그 해 5월 7일, 50여 척의 왜선을 포위 공격하여 그 가운데 21척을 불태워 임진왜란후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유명한 옥포 대전의 현장이 바로 여기이다.
이곳이 복음이 전래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01년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두 명의 신자가 거제도로 귀양 왔다는 사실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백서(帛書)'로 유명한 황사영의 모친 이윤혜이다. 기록에 의하면 황사영의 처 정난주는 제주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그리고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윤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또 한 사람은 1801년 전주 감영에서 순교한 유항검의 막내아들 유일석이다.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차남 유문석은 순교했고 딸은 흑산도로, 셋째아들 일문은 신지도로, 당시 세 살이던 막내 일석은 거제도로 귀양됐다고 한다.
신유박해로 맺어진 옥포와 천주교의 인연은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선교로 이어진다. 복음의 씨가 처음으로 옥포에 떨어진 것은 병인박해 직전으로 리델 신부와 순교자 구 다두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병인박해(1866-1873년) 중에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尹仕佑, 스타니슬라오)가 양산 '대처'를 거쳐 이곳 진목정(옥포리)에 와 전교 활동을 폄으로써 활발하게 포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순교자 윤봉문(베드로, [편집자주 : 교회사가들의 연구 결과 윤봉문의 본명은 베드로가 아닌 요셉으로 확인되었다])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로 거제의 사도로서 형 경문과 함께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守戒)에도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1887년 11월 병인박해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 신부였던 김보록 신부가 판공 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를 방문하자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자 15명을 영세 입교시킨다.
그러나 그 한 달 후 뜻밖에도 이 지역에는 공식적인 박해가 아닌 사사로운 탄압의 바람이 일어 윤봉문은 진수부, 주남이, 한상필 등과 함께 포도청으로 끌려간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모두 뇌물을 주고 풀려 나지만 윤봉문은 천주학의 괴수라고 해서 통영으로 압송된다.
수차례에 거친 문초와 혹형을 받으면서도 그는 배교와 밀고의 강요를 결연히 물리치지만 결국 진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뒤 진주로 이송된다. 굵은 칡넝쿨로 발목을 얽어 끌고 갔던 이 길에서 그는 칡넝쿨에 살이 뭉개지고 피가 흘러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고 전해진다.
진주에 이르러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그는 드디어 1888년 2월 22일 올가미에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진주 비라실(長在里)에 안장됐다가 후에 유족들에 의해 지금의 옥포인 진목정 족박골 산으로 이장된다.
그 후부터 진목정의 외교인들은 천주학쟁이가 죽은 동네 이름이라 해서 '진목정'을 '국산'으로 고쳤고, 후에는 지금의 옥포(玉浦)라 불렀다. 그의 무덤에는 1978년 2월 24일 기념비가 세워졌다.-
오늘도 주님과 성모님의 보살핌으로
순례 잘 마치고
단원들의 가슴에도
추억을 다복다복 담아서
무사히 귀가했습니다.
가을이 서서히
깊어가는 11월의
첫 주일
주님께서 주신
하루의 시간을
알차게 썼습니다.
댓글목록
홍보분과님의 댓글
홍보분과 작성일 2013-11-05 23:56
상세한 사진 설명 및 좋은글 제공에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 하늘의 문 쁘레시디움 단원 들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양덕명예기자님의 댓글
양덕명예기자 작성일 2013-11-08 08:27
《Re》홍보분과님 감사합니다.
하늘의 문을 열어 젖히고
은총을 비처럼 내려주시는
주님께도 감사드리며
그 은총을 우리 모두가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